예전에 몸담고 있던 디자인 전문회사에서 "디자인은 무엇인가?" (What is Design?)이라는 명제에 대한 대답을 공모하는 행사를 가졌던 기억이납니다.
국내 산업디자인 1.5세대 정도되는, 나름 해외파였던 그 디자인 전문회사의 사장님은 신문, 잡지, 방송등 다양한 매체에서 '디자인 경영'이라는 새로운 경영 컨셉을 주장하고 홍보하며 디자인에 관심을 갖기시작했던 국내의 많은 기업들을 클라이언트로 사로잡았더랬습니다.
많은 디자이너와 학생들, 디자인에 관심을 두고 있던 분들이 이 물음에 화답해왔었습니다.
그 무렵 출간되어 화제가 되었던 그 사장님의 에세이집이 다양한 매체를 통해 소개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이 사장님이 미국과 한국, 그리고 온 세계를 돌아다니며 진행한 다양한 산업디자인의 프로젝트와 그를 통해 추구했던 '혁신'에 감동했었기 때문이었죠.
그때 많은 분들로 부터 받았던 다양하고 기발한 대답을 정리하면서 저도 "디자인이 과연 무엇일까?"라는 의문을 갖고 꽤 긴 고민을 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 Design is imagination
- Design is visualizing
- Design is Making Difference
- Design is understanding
- Design is Inventing
- Design is making ourselves feel good
- Design is Communicating
- Design is Selling Confidence
- Design is Forecasting
- Design is finding solution
- Design is pleasing people
- Design is creating identity
- Design is making convenient tools
- Design is making life easier
- Design is saving lives
- Design is helping other people
- Design Is Loving Others
- Design is emotional logic....
등등.. 들어보면 '아하..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하면서 고개가 끄떡여지는 좋은 명제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사장님은 이때 모아졌던 명제들을 바탕으로 다시 에세이집을 출간하셨지만, 이 명제들이 저에게는 그 당시에 시작되었던 "디자인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해 명쾌하고 확실한 해답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명제들을 읽고 곱씹어보면 하나하나 맞는 말이지만, 왠지 모르게 잘 자란 나무 한그루 한그루를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숲이 아닌 나무를 말이지요.
어쩌면, "Design is.."라는 물음에서 시작된 하나하나의 명제들보다는 [디자인,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던 박인석 부사장님의 책이 조금 더 갈증해소에 도움이 되었고 나름의 생각을 정리하는데 실마리가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고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만,
'디자인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나름의 대답이 조금은 선명해져가고 있음이 느껴집니다.
'디자인은 문화의 프리즘이다. 문화를 투영하고 확대, 재 생산하는'.
1만년전의 동굴 벽화와 빗살무늬 토기, 산업혁명의 디젤기관과 자동차, 비행기에 이르기까지, 디자인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던 때에도 디자인 없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수렵을 통해 인간의 삶이 영위되던 때에는 수렵을 위한 도구들을,유목을 통해 인간의 삶을 영위하던 때에는 유목생활을 위한 도구들을 그리고 농경활동을 통해 인간의 삶을 영위하던 때에는 농경생활을 위한 도구를 디자인하고 만들어 왔습니다.
한번 만들어진 도구들은 편리함과 효율을 위해 디자인이 개선되기를 거듭하여 왔던 것이지요.
산업화가 상당히 이루어진 오늘날에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만들어서 쓰고 있는 모든 제품들의 디자인은 선택과 도태, 개선과 개량의 과정을 거쳐 효용가치와 효율, 그리고 편리함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만들어지고 진화되어가고 있습니다.
생산활동을 위한 도구들 뿐만 아니라 기록을 위한 도구, 학습을 위한 도구 그리고 감성을 고취하는 예술을 위한 도구와 그 결과물도 편리함과 효율을 높이는 방향으로 개선되어왔습니다.
모더니즘과 기능주의, 그리고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루이스 설리반의 명제를 이야기하지않더라도 말입니다.
그 형태가 기능을 따르든, 그 형태가 우리의 욕망을 표현하고 있든, 우리가 상상하고, 형상화하고 만들어 내는 모든 것들은 우리의 삶을 영위하게 하는 도구들이며 이를 통해 우리의 감성과 이성, 우리 삶의 모습이 오롯이 표현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디자인을 통해 우리 삶의 일부의 모습을 확대하고 또 구체화하고 개선하면서 우리 삶의 모습, 다시말하면 우리의 문화를 투영해내고 있는 것입니다.
지역마다, 세대마다 그리고 사람마다 삶의 모습이, 그 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전라도와 경상도의 문화가 다르고, 한국과 일본의 문화가 다르고 아시아와 유럽의 문화가 다르고 20대와 50대의 문화가 다른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저마다의 관심과 욕망을 반영하고 만족시키며 마치 모자이크처럼 서로 다른 색깔을 가진 문화와 그 문화를 비추는 디자인이 모여 또다시 새로운 디자인과 트렌드, 그리고 궁극적으로 새로운 문화가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좋은 디자인과 좋지못한 디자인은 어떤 근거로 구별이 될까요?
현대의 디자인은-적어도 산업디자인이라고 불리우는 산업과 시장을 기반으로하는 디자인 영역은- 순수미술과는 달리 트렌드에 민감하고 시장성에 따라 그 가치를 평가 받습니다.
삶의 모습, 즉 문화의 측면에서 바라보자면, 좋은 디자인은 문화를 잘 투영하고 또 그 문화의 구성원들이 바라는 바, 다시말하면 구성원들의 욕구를 잘 반영한 디자인일 것입니다.
좋지못한 디자인은 당시의 문화를 잘 투영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 문화의 구성원들이 원하는 바, 그들의 욕구를 제대로 반영하고 풀어내지 못한 디자인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이런 측면에서 보면 디자이너는 무척 큰 책임이 따르는 직업입니다.
그저 '예쁜 것'만을 만들어내는 사람은 디자이너의 명함을 갖기 어렵습니다.
디자인은 그저 그럴듯하게 겉포장을 하는 것이 절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디자이너는 시장과 사용자에 대한, 다시말하면 사람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적어도 시장과 사용자의 얘기에 귀기울일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디자인을 통해 창조되는 모든 것은 원천적으로 사람이 사용하고 사람이 향유하기위한 목적을 가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디자이너는 역사와 철학, 그리고 문화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필요합니다.
디자이너가 만들어 내는 디자인 작품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삶의 모습을 투영하고 재창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만들고 사용하는 것 중에 우연히 만들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제품의 역사를 돌아보면 철학적 배경과 문화적 배경을 소화하고 시대적 요구에 부흥한 제품들은 시장에서 빛을 발했습니다.
서울이 2010년 디자인 수도로 지정되고 지방자치단체장 후보들이 선거유세에서 디자인을 얘기할 만큼, 1회용 비닐우산을 살때도 디자인이 구매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될 만큼, '디자인'은 어느새 우리 생활에 친숙한 단어가 되었습니다.
이는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억지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디자인은 우리 삶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의 방식과 모습은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것이지, 누군가가 의도한대로 억지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디자인이 좋다, 나쁘다, 예쁘다, 안예쁘다를 논하기보다 문화라는 우리 삶의 모습이라는 조금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자신을 볼때와 같은 눈높이이기를 바랍니다.